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망자의 계정과 데이터가 ‘디지털 유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각국은 이를 어떻게 법적으로 다룰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개인정보 보호 법안인 GDPR(일반 개인정보 보호법)을 기반으로, 디지털 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법을 정립해 나가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유럽의 디지털 유산 관련 법과 제도를 중심으로 GDPR의 적용 범위, 사생활 보호 기준, 데이터 삭제 및 상속 가능성 등을 다각도로 분석해 봅니다.
GDPR과 디지털 유산의 법적 범위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은 유럽연합(EU) 전역에 적용되는 개인정보 보호 규정으로, 사용자의 데이터에 대한 소유권, 접근권, 수정권, 삭제권 등을 폭넓게 보장합니다. 그러나 GDPR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데이터 보호를 전제로 하고 있어, 사망자의 정보는 직접적으로 보호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EU 각국은 자국의 민법이나 상속법을 통해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을 보호하고 있으며, GDPR의 정신을 일부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사용자가 생전 디지털 데이터의 사후 처리를 명시할 수 있도록 법률적으로 허용하고 있고, 독일은 상속자가 고인의 SNS 계정 접근 권한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판결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는 곧, 유럽 내 디지털 유산 관리가 점점 더 법제화되고 있으며, 생전에 디지털 자산 처리 방침을 문서화하거나 유언장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한 전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생활 보호와 유족의 접근 권한 균형
사망자의 디지털 유산은 정보 보존의 문제와 동시에 사생활 보호의 이슈를 동반합니다. 유럽은 프라이버시를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망자의 계정이나 메시지, 사진 등에 유족이 무조건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부 SNS 플랫폼은 유럽법을 반영해, 사망자 계정의 '기념 계정' 전환은 허용하지만 직접 로그인이나 데이터 열람은 법원 명령 없이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망자의 의사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프라이버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독일 연방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부모가 자녀의 페이스북 계정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정이 내려진 바 있으며, 이는 '편지나 일기처럼 디지털 콘텐츠 역시 상속 자산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법적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생활 보호와 접근권한의 경계는 국가별로 차이가 크며, 법원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생전 사용자가 자신의 데이터에 대해 사후 어떻게 처리될지 명확히 지정해두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언장, 유산 지침서, 법적 위임 문서 등이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데이터 삭제 요청과 플랫폼별 대응
GDPR은 살아있는 사용자의 경우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를 보장합니다. 이는 데이터의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로, 사망자의 경우에도 유족이 일정 조건 하에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근거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유럽 내 많은 플랫폼은 유족이 사망자 계정 삭제 또는 비활성화를 요청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고 있으며, 이때 필요한 서류는 사망 증명서, 가족관계 증명, 위임장 등이 포함됩니다. 구글, 메타(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은 모두 유럽 규정에 따라 이러한 절차를 별도로 운영 중입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사망자의 데이터를 아예 자동 삭제하거나, 일정 기간 후 영구 보존 처리하는 법적 기준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디지털 데이터의 사후 처리에 대해 개별적인 지침을 만들었으며, 데이터 보존 기간과 삭제 권한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정책은 디지털 유산에 대한 개인의 권리뿐 아니라, 남겨진 가족의 감정과 법적 책임, 그리고 사망자의 사생활 보호를 균형 있게 고려하려는 유럽의 법적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유럽은 디지털 유산의 법제화에 있어 가장 선진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사용자와 유족의 권리를 균형 있게 보장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도 이러한 유럽의 사례를 참고하여 관련 법제 정비를 진행 중입니다. 생전에 나의 데이터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고 명확히 기록해두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습니다. 디지털 시대, 나의 흔적을 스스로 정리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